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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_해당되는 글 2건
2008/07/19   나는 쓰고 싶은 소설이 있었다. 
2007/07/09   박완서와 임성한, 이환경의 차이점? 

 

나는 쓰고 싶은 소설이 있었다.
+   [생각]   |  2008/07/19 03:46  
일상 중에는 생각밖에 할 게 없는 시간이 가끔 생긴다. 내가 글재주가 있었더라면 이럴 때마다 튀어나온 공상의 쪼가리들을 모아 소설이나 드라마 대본을 한 편 썼을 것이다. 사실 나는 돌려서 표현하는 이런 문학적인 재주는 없다. 진지하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멋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 지금으로선 저런 재주를 키워볼 마음도 없다. 어릴 적에야 문학적인 허영심에 해보고 싶어했지만 이젠 평생을 가도 내가 소설을 쓰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박노자를 읽고 보니 고종석이 밋밋하게 느껴지는 것도 진지와 직설에 더 가치를 두는 내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소설이나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바뀌고 있다. 완성은커녕 시작할 리도 없는 글짓기지만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중학교 때 쓰고 싶었던 소설은 초등학교 때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그것을 완전범죄로 만든 남자가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된 동생에게 죽는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였다. 중학교때까지 이걸로 만화로도 그렸었는데 어느 순간 다 버려서 지금은 없다. 정신이 사라졌는데 물질이 남아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쓰고 싶었던 소설은 고아 남매를 후원하여 훌륭한 성인으로 키우는 학교 선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이름도 아직 기억이 나는데 고아 소녀 이름은 성효진이었고,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은 안승민이었다. 대학교에서 '박효진'과 '안현정'을(성까지 부르는 건 내가 기분 나쁠 때 말투라고 누가 그랬던 것 같지만, 여기서는 비교를 위해 어쩔 수 없다) 만났을 때 처음부터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들의 성격이 좋았던 것이 첫번째 이유겠지만 내 개인적으로 애착이 있는 있는 이름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쓰고 싶었던 소설은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여자애가 남자애를 찾아 같은 대학에 온다는 이야기였는데 결국 내가 크게 점수를 주지 않았던 '연애소설'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돌림소설 때 한번 써보려고 했으나 역시나 미흡한 글재주 덕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언젠가 이걸 본 현정이가 여주인공이 딱 효진이라고 했었다. 물론 그것은 실제 글 내용과 상관없이 나를 놀리려고 했던 말일 것이다.

졸업하고 나서 쓰고 싶었던 소설 중 하나는 애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학원'선생과 그의 여자후배 '학교'선생 이야기였는데, 노파심에 말해두자면 현정이가 붙기 전에 생각한 이야기다. 학교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많은데, 애들이 학교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원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아 한번 써보고 싶었지만, 글쓰기는 재미있는 것만큼이나 귀찮은 일이다. 완성해도 그렇겠지만 그것이 완성하기 전엔 더욱더 별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나는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요즘 쓰고 싶은 소설이 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시덥잖은 공상을 죽 써본 것이다. 진지한 이야기가 좋겠다고 생각하여 한참을(그래봤자 버스에서 몇 번) 뭐가 좋을까 고민해서 내린 결론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과연 나는 나의 잘못을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까?

어떤 남자가 잠에서 깨어난다. 아무도 없는 곳이다. 그는 다시 평소와 같이 일상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일상이 그를 거부한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국가적으로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고, 결국 자신이 살인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그는 문득 자신의 기억에서 몇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살인 누명은 누명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저지른 것임을 알게 된다. 물론 죽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자신이 죽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알게 된다. 실수가 아닌 계획된 잔인한 살인 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친구에게서마저 도망치기 시작하고,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의 죄에 대해 죄값을 치러야 할까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가 내릴 결론은 사실 내가 아직 내리지 못했다. 인간은 과연 자신의 행동을 어디까지 책임져야 할까?

평소와 똑같이 자고 일어났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살인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할까? 범죄를 저지른 '나'는 과연 나일까? 같은 '나'가 아니라면 어쩌다 범죄자와 몸만 같이 붙어 있는 '나'는 처벌받기엔 좀 억울하지 않을까? 나는 이 상상을 하면서 '진짜 억울하겠다~'라고 생각했으나 그야 모를 일이다.

반대로 보면 인간은 역사적인 존재라고 한다. 과거의 내가 모여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경험, 기쁨, 슬픔, 즐거움, 노여움, 부끄러움, 거기에 망각한 기억과 그 흔적까지 모두 모아야 '나'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나와 큰 차이를 보이는 어떤 과거의 나라고 하더라도 내가 역사적인 존재인 이상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일본의 미친 짓을 보고 있자면, 사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이기는 하지만.

써놓고 나니 사족이 몸통보다 긴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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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 문학, 소설, 역사적존재,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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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와 임성한, 이환경의 차이점?
+   [어제와 오늘 하루]   |  2007/07/09 18:47  
연이가 박완서가 싫다고 했다. 수필을 소설처럼 써놓았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나는 딱히 박완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경험을 소설처럼 썼다고 해서 욕을 먹을 것까지야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박완서의 소설을 읽고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고,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하는 장르적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을 했다. 발표를 소설로 했으니 그냥 소설로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박완서가 소설은 자전적 이야기라고 했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 것은 아니니 도덕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어보였다.

그러다가 임성한, 이환경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임성한은 각종 직업 비하에 황당한 대사들로 쓰레기 작가군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고, 이환경은 김두한, 이명박 등을 영웅시하는 드라마로 내가 매일같이 욕을 하는 것들이다. 문득 저것도 드라마고 허구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엥? 그렇다면 박완서와 임성한과 이환경이 동급인가 하고 생각하려고 보니 이건 내가 딱히 좋아하진 않았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던 박완서한테 미안한 짓이 아닌가? 나는 박완서와 나머지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단 이환경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우리 근대사에서 자주 거론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유명인이면서 동시에 한 가닥 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에 대한 정보가 왜곡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초등학생들이 건달을 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고, 서울시를 자기 종교 신한테 줘버린다는 정신 나간 전임 시장을 영웅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박완서가 그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즉 박완서가 자전적 소설에 담겨 있는 그 인물을 어떻게 그리건 간에 독자들에게 별 영향을 끼칠 수 없지만(애들에게 박완서의 소설에 나온 등장인물 누군가를 비판하라고 해보시라. 애들은 그게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두한, 이명박이는 다르다.), 이환경이가 그리고 있는 인물은 사회적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들이라는 말이다.

박완서와 임성한의 차이는 더욱 극명하다. 자기 딸과 자기 아들을 교배시키는 설정은 참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박완서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고통받고 힘들어한다면, 임성한의 드라마에선 인물들이 남을 괴롭히는 것이 일이다. 꽃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을 멍청하다고 하는 데다, 간호사, 간호조무사, 기자, 요리사 등은 다 개념없는 직업인들이 되고, 드라마 작가는 세상에서 젤 착하고 현명한 사람처럼 묘사되는가 하면, 검정콩을 안 먹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무식해서 이걸 안 먹어"라는 대사를 날리고, 거기에 맞장구를 치지 않나(먹는 거야 내 마음이지), 얼굴에 참기름을 발라야 피부가 고와진다고 개헛소리를 하지 않나(피부과 전문의가 옥동자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하지 말라고 했다), 박완서 소설에서는 적어도 인물들이 개념은 있다.

간단한 일이다. 이환경이 욕을 안 먹으려면 역사적 인물의 인기에 기대 그 인물을 영웅시하면서 콩고물을 주워먹으려는 시도를 하기보다 아예 새 인물을 창조하는 노력을 하란 것이다. 박완서는 자기 인물을 천하무적의 영웅으로 그리진 않는다. 그리고 말할 가치도 없는 임성한은 군대 가서 한 삼 년 개념탑재를 해야 된다.
 
 
     김두한, 드라마, 박완서, 소설, 연이, 이명박, 이환경, 임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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